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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묻지만 흉기난동▣

근거 없는 의혹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라고?


근거 없는 의혹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라고?
[박상현 칼럼] 불행하게도 그게 민주주의다… 음모론을 불식시키는 건 신뢰와 외부감시 제도화
박상현 IT칼럼니스트 gospark@gmail.com 2015년 07월 22일 수요일


음모론 몇 가지. 1950년대 미국에서는 CIA가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실험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가 하면 미국 정부가 조지아 주에 모기를 풀어서 황열(yellow fever)을 퍼뜨리는 실험을 한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는 박테리아를 퍼뜨려서 생물학무기를 실험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개는 미 중앙정보국(CIA)과 관련된 소문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유명인들 중에는 CIA가 자신을 몰래 도청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자살한 작가 헤밍웨이가 말년에 그랬고, 비틀즈의 스타 존 레넌이 그랬다. 심지어, CIA가 중앙아메리카에서 강력한 마약인 코카인을 밀수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들도 있었다.

미국은 음모론의 나라다. 음모론(conspiracy theory)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곳도 미국이고, 지금도 그 숫자와 종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많은 음모론을 가진 나라가 미국이다. 워낙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터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정부나 권력을 무턱대고 불신하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유야 어떻든 세계 최초로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선 나라에서 정부를 불신하는 음모론이 넘쳐난다는 것은 아이러니일까?

“이탈리아 해킹팀으로부터 같은 프로그램을 35개국 97개 기관이 구입했습니다. 이들 기관들은 모두 '노코멘트' 한마디로 대응하고 이런 대응이 아무런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자국의 정보기관을 나쁜 기관으로 매도하기 위해 매일 근거 없는 의혹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습니다."

국가정보원 직원의 비극적인 자살사건을 두고 동료 일동이 내놓은 공동성명의 일부다. 해킹팀 뉴스가 외국 언론에 특별히 대서특필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 “매일 근거 없는 의혹”을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국정원 직원들의 주장은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과 다른 34개국은 무슨 차이가 있길래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해킹팀의 소프트웨어를 구입한 국가의 명단을 보면 미국, 독일, 스위스 같은 선진국들에서부터 러시아, 칠레, 수단, 체코,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같은 나라들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이 나라들은 1) 국민이 국가권력의 민간인 사찰에 관심이 없거나 2) 그 나라의 정부가 민간인 사찰을 한 전력이 없거나, 아니면 3) 민간인 사찰이라는 인권침해가 발생할 경우 그를 철저하게 규명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제도적인 장치가 있는 나라들이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이 세 가지에 해당사항이 하나도 없다. 사찰을 하건 말건 국민들이 상관을 하지 않을 만큼 후진국도 아니고, 각종 민간인 사찰의 전력이 있고, 심지어 정보기관이 대선에 개입한 사실이 확인되었어도 큰 문제가 없이 넘어가니 국민들은 국가의 법 질서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갖고 있다. 한국은 국민들이 '근거 없는 의혹'들을 쏟아내기에 가장 완벽한 환경을 갖춘 것이다.

미국에 이탈리아 해킹팀의 뉴스가 알려지지 않은 게 아니다. FBI가 문제의 프로그램을 산 내용이 미국언론에 보도 되었지만 한국에서처럼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미국의 정보, 수사기관들은 그러한 권력남용으로 큰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악명높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밝혀진 사실 중 하나가 정보기관인 CIA와 수사기관인 FBI, 심지어 우리나라의 국세청에 해당하는 IRS가 닉슨 정권 하에서 정치인과 정치단체들을 상대로 사찰과 협박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는 전세계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미국의 공권력은 그런 모든 일을 통해 학습을 했고, 이제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정도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신뢰는 확보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한국만큼 이 문제가 대서특필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이 공권력에 대한 감시를 늦추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앞에서 음모론 이야기를 했지만, 미국인들의 정부와 공권력에 대한 의심은 한국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근거가 전혀 없는 소문과 사실이 뒤섞여서 온갖 추측과 악소문이 난무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대부분은 거의 정신병자 수준의 이야기지만, 그러다가 에드워드 스노든의 주장처럼 사실로 밝혀지는 것들도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든 소문은 근거가 없고, 지저분하고, 유치하다.

불행하게도 그게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효율적이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들은 까다롭고, 성가시고, 의심이 많은 '진상' 고객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의 공무원들은 그 어떤 정치체제 하의 기관들 보다 가장 피곤한 노동자들이다. 일식집을 운영하는 필자의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한한 사람들을 다 상대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식당일 못한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피곤한 국민/고객들을 상대하는 것이 싫다면 국가기관에서 일하지 않는 게 낫다. (물론 선출직은 말 할 것도 없다). 미래에 더 나은 제도가 등장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현재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나은 제도는 깔끔한 독재가 아니라 지저분한 민주주의다. 토머스 제퍼슨의 말처럼,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하면 독재가 자라고, 정부가 국민들 두려워하면 자유가 자라기 때문이다.

국정원 직원의 자살 소식에 국민들이 가슴 아파하는 것은 그가 대부분의 국민들처럼 그저 조직만 믿고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던 소시민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40대 중반이라는 나이는 어디서나 가장 책임이 크고 왕성하게 일할 조직의 허리인데, 본인의 업무를 열심히 한 결과가 결국 그러한 인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번 사건이 한국인들에게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익숙함이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인생을 바친 이 조직은 나를 보호해줄까, 아니면 도마뱀 꼬리처럼 나를 버리고 생명을 유지할까?’

세상을 떠난 국정원 직원의 동료들이 발표한 성명서의 방향에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바깥에는 진상 고객들이 널려 있다. 진상 고객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서비스업에서 일해 본 사람들이라면 잘 알 듯) 고객들은 원래 무례하다. 따라서 그런 고객들로부터 회사가 직원을 보호해야지, 그런 고객들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민주주의 국가의 까다롭고 피곤한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FBI, CIA의 직원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국민의 감시가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외부감시의 제도화가 되지 않은 정보기관, 권력조직에서 일하는 건, 물이 새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것처럼 조직원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에서 물이 새면 선장과 선주를 탓해야지 바다 탓을 할 수는 없다. 바다는 원래 물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국민의 '근거 없는' 의심과 의혹은 싫든 좋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절대 변하지 않는 상수(常數)다. 같은 민주주의 방정식에서 다른 답을 얻으려면 제도적 변수(變數)를 바꾸는 방법 밖에는 없다.

사족을 달자면, 서두에서 소개한 음모론들은 훗날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특히 마인드 컨트롤 실험은 “MK울트라”라는 프로젝트 하에서 이루어졌고,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행해졌던 하바드 대학의 헨리 머리 교수의 실험대상이 된 22명 중에는 (17년에 걸쳐 미국 내 연구소들에 편지 폭탄을 보내어 악명을 떨친) “유나바머”가 된 천재소년 테드 카진스키도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