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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경(기사)정치권▣

인혁당 피해자 가족들도 고통의 세월… 감시·미행·빨갱이 낙인, 일터 쫓겨나 이사 전전


인혁당 피해자 가족들도 고통의 세월… 감시·미행·빨갱이 낙인, 일터 쫓겨나 이사 전전
경향신문 | 입력 : 2012-09-13 22:10:29ㅣ수정 : 2012-09-14 00:03:09


인혁당재건위 사건 뒷이야기

'인민혁명당재건위' 사건은 사형을 당했거나 수십 년의 징역형을 받은 피해 당사자들은 물론 그 가족들에게도 모진 고통을 가져다줬다.

법원행정처가 사법부 출범 60주년(2008년) 기념으로 2009년 발행한 <역사속의 사법부>에는 인혁당재건위 사건 판결 이후 사건 당사자 가족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책을 보면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송상진씨의 부인 김진생씨(82)는 1975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피고인들이 공산주의자이고, 구명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강요받았다. 한복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김씨는 "경찰들이 항상 주변을 감시해 빨갱이로 소문이 났다"며 "이웃들이 일감을 주지 않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고 책을 통해 회고했다.

무기징역을 받았던 강창덕씨의 부인은 경북 영천의 한 초등학교의 분교로 근무지를 옮겨야 했다. 20년형을 선고받았던 김종대씨의 부인은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둬야 했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15년형을 받았던 임구호씨의 동생 임진호씨는 형의 석방을 요구하며 민주화운동을 하다 투옥됐다. 임씨의 아버지는 "남의 하늘(일제 치하) 아래 살아도 이것보다 더 혹독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황현승씨의 부인 안보형씨는 사건 직후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1981년 세상을 등졌다.

책에 언급된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나머지 피해자 가족들도 하나같이 고통으로 점철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사형 피해자 이수병씨의 부인 이정숙씨(67)는 남편을 마지막으로 봤던 1975년 4월1일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돌을 갓 지난 딸을 업고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는 이씨를 딱하게 여긴 서대문구치소 교도관이 몰래 남편과 만나게 해줬다. 교도관은 이씨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내 목이 달아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이씨는 남편을 보고 한마디도 못했다. 이씨는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달려들어 무슨 말이라도 했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수병씨는 그로부터 8일 후인 4월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무기징역을 받았던 이성재씨(86)는 인혁당 사건으로 아들을 잃었다. 1975년 당시 이씨를 체포하려던 중앙정보부는 이씨의 소재를 알기 위해 이씨의 아들을 고문했다. 이 고문으로 이씨의 아들은 충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이씨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아들을 치료하려 했다. 하지만 적응하지 못한 아들은 한국에 혼자 돌아와 2001년 자살을 선택했다.

남편 하재완씨가 사형을 당한 이영교씨(76)는 인혁당 사건으로 "지금도 외롭게 지낸다"고 털어놨다. 남편이 사형을 당한 뒤 이웃과 친척들은 이씨를 멀리했고 이씨는 10번 이상 이사를 다녀야 했다. 이씨는 "한 많은 인생을 살다보니 지금도 다리가 떨린다"며 "이웃과 친척들이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인지 내게 연락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형 피해자 김용원씨의 부인 유승옥씨(74)는 1975년 남편을 잃고 난 뒤부터 중앙정보부의 감시에 시달렸다. 사복을 입은 중정 요원 2명이 유씨의 집을 지켰고, 유씨가 집을 나서면 유씨를 미행했다. 유씨는 "그들은 내가 버스를 타면 버스를 탔고, 걸으면 따라 걸었다"며 "어딜 가든 나를 따라다녔다"고 회상했다.

<박순봉 기자 gabgu@kyunghyang.com>


“‘인혁당 누명’ 남편 사형판결에 오열, 설마 했는데 교도소 문틈으로 본 게 마지막”
경향신문 | 입력 : 2012-09-13 22:10:22ㅣ수정 : 2012-09-14 00:0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