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내 통신자료도 봤을까
경향신문 | 입력 2012.11.10 10:38 | 수정 2012.11.10 11:13
·검·경·국정원 매년 수백만 건 수집… 감시장치 없어 오남용 우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해 12월 26일 오후 5시부터 10분 동안 서울교육문화회관 주변에서 통화한 사람들의 통화내역을 살펴봤다. 검찰은 KT·SKT 등 통신사들로부터 서울교육문화회관 인근의 기지국을 통해 이 시간에 통화한 659명의 10분 동안 착발신된 전화번호와 착발신 시간, 통화시간, 수신·발신번호 등을 조사했다. 검찰의 기지국 수사는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예비경선이 실시된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금품수수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검찰은 659명의 통화내역을 샅샅이 뒤졌으나 범행 단서를 확보하지 못하는 등 헛수고에 그쳤다. 검찰은 수사를 명목으로 법원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당시 기지국 주변에서 통화한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저인망식으로 확보한 것이다
비록 합법적인 기지국 수사였지만 검찰이 개인정보를 본인도 모르게 수집했다는 사실은 당사자에게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 예비경선을 취재하고 있던 한 인터넷신문 기자도 659명의 '통신사실 확인자료' 대상에 포함됐다. 이 기자는 "검찰의 기지국 수사가 통신비밀과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했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심판청구서를 제출했다.
민주통합당 서영교 의원(오른쪽 두 번째)이 11월 2일 정보·수사기관 감청의 오·남용 방지를 위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법률안'을 발의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서영교 의원실 제공통신사 요청 않는 직접 감청은 베일에
부산 영도경찰서는 4차 희망버스 직전인 2011년 8월 24일부터 10월 21일까지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노동실장의 휴대전화 위치를 기지국을 통해 실시간으로 추적했다. 이 같은 사실은 검찰이 두 사람을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한 수사기록에서 드러났다. 송경동 시인은 "내가 당시에 실시간으로 위치를 사찰당했다고 생각하니 매우 두려웠다"며 "이 사건 이후로 지인들 중에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통화한 자료도 수사기관에 자료가 제공되느냐고 묻는 등 통화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경찰·검찰·국정원 같은 정보·수사기관이 해마다 수백만건의 개인통신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주로 개인이 사용하고 있는 유선전화, 이동전화(휴대폰), 인터넷 등이 대상이다. 정보·수사기관이 많은 통신 관련자료를 수사 명목으로 제공받고 있지만, 아무런 감시장치 없이 개인정보가 정보·수사기관에 넘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정보·수사기관들은 통신사업자(통신사)와 인터넷 사업자(포털)로부터 통신비밀보호법과 전기통신사업법 등에 근거해 통신제한(감청), 통신사실 확인자료, 통신자료 등 통신 관련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 최근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2012년 상반기 통신제한 및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 현황에 따르면 수사기관에 수사 대상자의 통신 내용를 확인해준 통신제한(감청) 건수는 국가정보원(국정원)이 제일 많았다. 국정원은 정보·수사기관이 감청한 전체 전화번호 수 3851건 중 3714건(96.5%)을 차지했다. 그 다음으로 경찰(119건), 기무사 등 군수사기관(17건)이었다. 하지만 이동전화를 통한 감청통계는 '0'으로 잡혀 있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정보·수사기관 및 방통위의 고의 누락 가능성을 제기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최재천 의원은 "통신비밀 자료가 수사기관에 과도하게 제공됨으로써 시민의 통신비밀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며 "또한 통신비밀 자료 누락·왜곡이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국정원이 직접 감청하는 것을 포함하면 감청건수는 이보다 훨씬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정보·수사기관이 통신사로부터 제공받는 통신 내용은 일종의 간접 감청에 해당한다.
독일 일본 등은 관련기관 입회시켜 감시
정보·수사기관이 통신사에 요청하지 않고 직접 감청하는 경우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국정원은 지난 2001년까지 휴대전화 감청장비인 '카스'를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2009년에는 인터넷 회선 감청(패킷 감청) 장비 31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제공한 경우를 보면 정보·수사기관이 상반기에만 무려 1263만여건이나 통신사로부터 제공받았다. 통신사실 확인자료란 수사기관이 법원의 허가를 받아 통신사로부터 일정한 시간에 이뤄진 개인의 수·발신 전화번호 등 통화내역을 제출받는 것을 말한다. 올 상반기 동안 경찰은 1226만8487건의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수집했다. 하루 평균 6만7409건의 개인정보가 경찰 손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다. 검찰은 상반기 동안 11만6402건, 국정원은 2093건의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제공받았다.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건수가 많은 것은 대부분 기지국 수사에서 제공받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보통 한 개의 기지국 내에서 통화하는 사람들 수는 요청 시간에 따라 다르지만 수백명에서 수만명까지 다양하다.
문제는 정보·수사기관이 개인의 통신 관련자료를 수집했다고 해도 해당 기관으로부터 정식으로 통보를 받지 않으면 모른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경찰 관계자는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받은 사람들 중 수사를 했을 경우는 본인에게 통보한다"며 "하지만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통해 단순히 전화번호를 받았다고 모두 수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사하지 않은 경우는 통보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개인의 통신 관련자료 제출 시 현재보다 엄격한 허가요건이 필요하고, 정보·수사기관이 자료를 제공받을 때 제3자가 입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금은 정보·수사기관이 통신사 또는 포털로부터 개인정보를 받을 때 어느 정도 규모를 가져가는지, 언제까지 보관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정보·수사기관의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법원에 요청하면 법원은 대부분 허가해준다. 법원의 기각률은 1% 미만이다.
하지만 선진국들은 다르다. 독일에서는 정보·수사기관이 통신사실 확인자료를 통신사로부터 제공받을 때 법원 직원을 반드시 입회시켜야 하며, 일본은 해당 지자체 직원을 파견해 감시한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서영교 의원은 최근 통신제한조치를 집행하는 경우에는 법원이 선임한 사람을 입회하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통신비밀보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법원의 영장이나 허가 없이 제공받을 수 있는 통신자료 제공에 대한 남용은 더욱 심각하다. 통신자료는 수사기관이 사업자에게 특정시간, 특정IP 등을 제시하고 사업자로부터 제출받은 관련 이용자 정보를 말한다. 전화번호 수와 아이디 수 기준으로 수사기관에 제공된 통신자료는 올 상반기에 무려 385만6357건이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323만1609건)와 하반기(261만7382건)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다.
최근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 3대 포털과 무료 문자서비스 업체인 카카오톡은 경찰, 검찰 등 수사기관이 요청한 통신자료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기로 했다. 이는 서울고등법원이 NHN(네이버)을 상대로 차모씨 등이 제기한 항소심 판결에서 NHN에 일부 패소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김연아 편집 동영상(일명 '회피 연아' 동영상)과 관련한 당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명예훼손 고소사건과 관련해 차모씨 등은 네이버가 무단으로 개인의 신상정보를 경찰에 제공했다며 NHN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었다.
<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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